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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강 금천구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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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금천구 스토리 및 설화
시흥동에 있는 호압사 창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남아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수도 건설을 위한 각종 공사를 진행하였다. 그런데 도성을 축조하는 가운데 신축 중이던 궁궐이 무너지는 등 여러 사건이 발생함에 따라 공사 진척이 순조롭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어둠 속에서 반은 호랑이고, 반은 모양을 알 수 없는 이상한 괴물이 나타나 눈에 불을 뿜으며 건물을 들이받으려고 하였다. 이때 태조가 괴물에게 화살을 쏘라고 하였고, 화살은 빗발처럼 쏟아졌으나 괴물은 아랑곳하지 않고 궁궐을 무너뜨리고 사라졌다. 태조가 침통한 마음으로 침실에 들었을 때 어디선가 “한양은 비할 데 없이 좋은 도읍지로다.”라고 하는 노인의 우렁찬 소리가 들렸다. 태조는 깜짝 놀라 “누구냐”고 소리를 질렀고, 노인은 “그건 아실 것 없고 장군께서 심려하시는 것을 덜어드릴까 하여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태조가 무슨 묘안이 있느냐고 묻자 노인은 저 멀리 보이는 한강 남쪽의 한 산봉우리를 가리켰다. 태조는 달빛 속에서 노인이 가리키는 곳을 보고 깜짝 놀라 소리를 쳤다. “호랑이다. 저 호랑이 머리를 한 산봉우리가 한양을 굽어보고 있다.”고 하면서 노인에게 저 산봉우리의 기운을 누를 방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노인은 “호랑이란 꼬리를 밟히면 꼼짝 못하는 짐승이니 호랑이 형상을 한 산봉우리의 꼬리 부분에 절을 지으면 만사가 순조로울 것입니다.”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그 다음날부터 이곳에 절을 짓고 절 이름을 호압사라 하였다고 한다.
2.
조마길
조마고개는 가산동 148-1에서 150-2번지 어딘가에 있는 곳이다. 가산동이든 독산동이든 워낙 산지에서 내려오는 지형이라 여기저기가 다 고개다. 오늘 찾아가는 조마弔馬고개는 활자로만 남아있는 듯하다. 여러 자료를 찾아보고 가산초등학교가 있는 남부순환도로 육교에서부터 인근보다 조금 높다 싶은 길을 여기저기 헤매다가 이름이 남아있는 “조마공원”으로 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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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마공원에 이름이 붙여진 이유가 있을 터인데. 서울문화사학회에서 펴낸 “금천향토문화지”에 조마고개를 이렇게 설명한다. 가산동 노인정 아래 기다랗게 자리한 모아래澤下 마을 뒷등성이 너머에 있는 작은 고개이다. 고개의 형체는 찾아보기 어려우나, 용마혈龍馬穴은 청룡혈과 이어진 고개산으로 이곳에 위치한 마을이 그 기운을 받아 서울까지 뻗쳐 마치 서울을 수호하는 형국이었다고 한다. 이 고개이름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서울로 진격할 때 용마혈을 지키는 용마를 죽여 버렸으므로 이를 애도하기 위해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출처: https://gcinnews.tistory.com/1387 [금천마을신문 금천in:티스토리]
3.
정조대왕의 효심으로 창건된 시흥행궁(시흥5동)
조선 제22대 왕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추모하기 위해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수원화성으로 떠났습니다. 8일간의 여정 중 이틀 간 시흥행궁에 머물러 백성들의 억울한 사연을 들어줬답니다 .[출처] 조선 제22대 왕 ‘정조’, 시흥행궁에 납시었네!|작성자 금나래
5.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6968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금천구
[가리봉동을 다시 찾는 사람들] 1960~1970년대를 가리봉동에서 보낸 많은 사람들은 가리봉동에 향수를 갖고 있다. 젊은 시절 고생하며 다니던 공장이며, 그 안에서 친구와 동료와 선후배와 함께 지낸 이야기들이 모두 녹아 있기 때문이다. 가리봉동에서 처음에는 빵집을 하다가 지금은 해미횟집을 운영하고 있는 이완기 씨는 “어느 날 중년의 부인들이 횟집으로 들어왔어요. 그러더니 ‘혹시 여기가 빵집 아니었나요? 크리스탈 베이커리라고?’라고 물어 보자나요. 그게 제가 횟집으로 업종 전환하기 전에 했던 빵집 이름이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아느냐고 물어 봤더니, 자기들 젊었을 때 여기서 일하면서 빵도 많이 사 먹었다네요. 그 추억을 되살려 보려고 다시 가리봉동에 왔는데 다 바뀌고 없어졌다고 아쉬워하대요.” 불과 20~30년 만에 일어난 가리봉동의 변화였다. 특히 최근 10년간 가리봉동 옆에 위치한 구로동이 디지털 단지로 바뀌면서 변화는 더욱 가속됐다. 이제는 불과 5년 전 모습도 찾기 어려울 정도로 가리봉시장은 10년 동안 크게 변했다. 한국 상점이 대부분 사라지고 중국인을 상대로 하는 가게들이 거리를 차지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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